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지 1세 (문단 편집) === 의문의 죽음 === >"영국인들의 숙원이 이루어졌다." >---- >1939년 4월 5일 [[가디언]]지 그러던 중 1937년, 친위 쿠데타를 주도한 바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추방되었던 친영파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전 수상 누리 사이드의 아들 사바 사이드를 비롯한 친영파 정치인들은 가지 1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는데 섭정위원회 설치, 가지 1세의 삼촌 제이드의 옹립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영국은 가지의 사촌인 친영파 압둘 일라흐를 즉위시킬 것을 주장했다. 1939년 4월 3일 심야, 참모 두명과 함께 운전을 하던 가지 1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지 1세는 황급히 후송되었으나 끝내 4월 4일 아침에 숨지고 말았다. 허나 전신주를 들이받아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공식 발표와 달리 가지 1세의 차량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가지 1세가 과속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가지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머리 부상은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을 부검한 사에브 사카트 박사도 가지 1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망증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내무장관 나지 사카트는 친영파의 압력으로 사건을 종결해야 했고 다시 권력을 잡은 친영파는 사건 재수사를 철저히 금지했으며 사건을 파헤치려는 사법부를 탄압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하면서 4살밖에 되지 않은 [[파이살 2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하지만, 파이살 2세가 너무 어려서 당시 가지 1세의 삼촌이였던 [[압둘 알-일라]]가 섭정이 되었다.] 이라크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지 1세의 장례식 행렬에 바그다드 시민들은 [[누리 알 사이드]]를 향해 "당신은 가지 왕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울부짖으며 왕의 복수를 외쳤고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반란 등 반영 소요가 계속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라크 왕국은 왕국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던 가지 1세가 조기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라크 왕국은 1958년 쿠데타로 붕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